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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창의군

한자명 十三道倡義軍
설명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및 군대 해산에 따라 일어난 정미의병 때 전국에서 모인 의병들이 결성한 군대
상세 설명 이인영은 원주를 거점으로 하는 관동창의대장에 오른 뒤 사방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김세영(金世榮)을 서울로 잠입시켜 격문을 등사해 각국 영사관에 전달함으로써 항일의병투쟁의 합법성을 국제적으로 호소하였다. 이인영은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砥平)·춘천을 횡행하며 8도의병 규합에 진력하면서 각 도의 의병부대에 격문을 띄워 11월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에 호응한 각 도의 의군은 ‘13도창의대진소’를 설치했으며,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편성된 13도창의대진소의 부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3도의병 총대장 이인영 그 배하에 전라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호서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교남창의대장 신돌석(申乭石), 진동창의대장 허위(許蔿), 아장 박정빈(朴正斌), 관동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관서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이었다. 그리고 총병력은 1만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는 정예군이라 할 수 있는 해산군인 3,0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뒤 원수부 13도창의대진소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權重熙),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창의대장 정봉준으로 개편되었다. 개편 후의 의병장은 모두 양반 유생 신분으로서 천민 출신의 용장인 신돌석이 배제되었다. 또한 홍범도(洪範圖)·김수민(金秀民) 등 평민 출신 의병장이 연합전선에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 이 13도연합의군이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11월부터 서울 진격을 목표로 설정하고 진격을 개시해 경기 일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908년 1월 말 총대장 이인영이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통수권을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문경으로 떠났다. 제2대 총대장이 된 허위는 제2차 서울탈환작전을 수행했으나 화력의 부족과 일본군에게 의병부대가 개별적으로 타격을 받아 결국 연합의병의 서울탈환작전의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다. 이로써, 13도창의군은 완전 해산해 각기의 연고지로 돌아가 독자적인 의병활동으로 환원하였다. 이인영은 1909년 6월 일본군에게 잡혀 9월에 순국함으로써 3년 종상(綜詳 : 치밀하고 자세함)의 꿈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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