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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 선언

한자명 二八獨立宣言
설명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재일 조선인유학생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
상세 설명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한 국제 정세의 변화, 즉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에서 선언된 제정 러시아 치하의 피압박 민족들에 대한 민족자결의 원칙, 1918년 1월 8일,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이 새로운 전후질서의 원칙으로서 표장한 표방한 ‘14개조’ 중 민족자결주의 등은 식민지, 반식민지 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이는 국내외에서 항일민족운동의 기운을 고조시켰다. 특히 2·8독립선언을 직접적으로 자극한 것은 1918년 12월, 재미동포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했다,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 2차 연례총회에서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등의 〈저팬 애드버타이저 The Japan Advertiser〉의 보도였다. 보도를 접한 재일유학생들 사이에는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반대하고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의사를 파리강화회의에 반영시키기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해진다. 한편, 이 무렵 상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도쿄로 파견한 조소앙(趙素昻), 장덕수(張德秀), 이광수(李光洙)는 한국민족대표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다는 소식을 알리고 재일본 조선인유학생들의 궐기를 고취했다. 1919년 1월 6일에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도쿄 시내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서춘(徐椿)·이종근(李琮根)·박정식(朴正植)·최근우(崔謹愚) 등이 해외동포들이 독립의 기회를 맞아 독립운동에 열심인 이때 자신들도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임시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 서춘, 백관수(白寬洙), 이종근(李琮根)·송계백(宋繼白)·김도연(金度演)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 중 전영택(田榮澤)이 신병으로 사임하자, 이광수와 김철수(金喆壽) 등이 추가되었다. 총 11명으로 구성된 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일본정부, 각국 대사와 공사,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 등에 보내기로 하였고, 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 부(附) 결의문>, <민족대회소집 청원서>은 국문, 영문, 일문 등으로 인쇄되었다. 1919년 2월 8일 아침 10시, 실행위원들은 준비된 청원서와 선언서를 먼저 우편으로 동경주재 각국 대사관·공사관과 일본정부의 각 대신, 일본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내고,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유학생 대회를 개최하였다. 개회 선언 이후 대회 명칭을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대회로 바꾸고, 600백 명의 남녀학생이 모인 가운데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독립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이 대회에서 유학생들은 독립실행 방법을 토의하려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강제 해산 명령으로 27명이 체포되었다. 이 중 1월 말 상해로 떠난 이광수를 제외하고, 임시실행위원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0명은 출판법 제27조 위반으로 2월 10일 도쿄 지방재판소 겅사국에 송치되었다. 2·8독립선언 후 지도부가 검속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여 일본 국회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하여 2월 12일 100여 명의 유학생들이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에 모여 이달(李達)을 회장으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려 했으나, 이달 등 13명이 붙잡혀 해산되고 말았다. 23일에는 변희용(卞熙鎔)·최재우(崔在宇)·장인환(張仁煥) 등 5명이 조선청년독립단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하여 역시 히비야 공원에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배포 도중에 붙잡혔다. 또한 3·1운동이 일어나자, 유학생들은 3월 9일 재동경조선청년독립단동맹휴교촉진부를 결성해 유학생들에게 학교를 동맹휴학하고 귀국하여 본국의 만세시위운동에 합류하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띄웠다. 또 3월 10~11일 변치덕(卞致德)·정근모(鄭根模)·이재훈(李載勳) 등은 태극기 130여 개를 만들어 최팔용 등의 공판일에 모인 유학생들에게 배포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했다. 일제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3·1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한 한국인 총수는 491명, 그중 유학생이 359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상해로 건너간 이광수는 영문으로 된 2·8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미국 대통령 윌슨과 클레망소·로이드 조지 등에게 전문으로 보내는 한편, 상해에서 영자신문인 『China Press』와 『North China Daily News』등에 한국의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알렸다. 국문으로 된 선언서는 송계백과 최근우에 의해 국내에 반입되어, 중앙학교의 현상윤(玄相允)·송진우(宋鎭禹)·최남선(崔南善)·최린(崔麟) 등에게 전해졌고,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가 되었다. <2·8독립선언서>는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다. 또한 식민지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8독립선언은 3·1운동에 앞서 국내외에 독립운동을 고취한 선구적 운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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