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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한자명 三一運動
설명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도시에서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변모했다. 이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중국의 만주와 일본의 도쿄·오사카, 미국의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독립선언문을 작성·서명하고 운동을 계획한 이들이 각 종교와 단체를 연합한 민족대표 33인이라면, 실제 전국적인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무명의 학생과 청년들이었다.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강경 진압해 통계상으로만 3개월 동안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상세 설명 원인과 배경-3ㆍ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했다.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ㆍ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다. 그리고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으로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했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의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한 국제정세의 변화도 3ㆍ1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의 성격을 지닌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열강 간의 힘 관계가 재조정되어 국제 정치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등에서 전제국가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하여 새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 치하의 피압박 민족들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선언하면서 식민지 민족운동들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1918년 1월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세계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즈음하여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시대 분위기는 국내외에서 항일민족운동의 기운을 고조시켰으며, 특히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을 ‘세계 개조의 신시대’로 인식하면서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을 환기시켜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 준비과정-국외의 항일운동세력은 국제 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였다. 상하이[上海]에서는 1918년 6~7월 무렵부터 여운형(呂運亨)ㆍ김규식(金奎植)ㆍ장덕수(張德秀)ㆍ김철(金澈)ㆍ선우혁(鮮于爀)ㆍ서병호(徐丙浩)ㆍ한진교(韓鎭敎)ㆍ조동호(趙東祜) 등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Charles R. Clane)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ㆍ김철ㆍ서병호, 김순애(金淳愛)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하였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李承晩)ㆍ민찬호(閔瓚鎬)ㆍ정한경(鄭翰景)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8년 12월 조소앙(趙素昻)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呂準)ㆍ김좌진(金佐鎭)ㆍ황상규(黃尙奎)ㆍ박찬익(朴贊翊)ㆍ김교헌(金敎獻)ㆍ안창호ㆍ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이듬해 2월 1일 이를 발표하였다. 음력으로 무오년(戊午年)에 작성되어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東京]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로 꾸며 모임을 갖고 최팔용(崔八鏞)ㆍ김도연(金度演)ㆍ백관수(白寬洙)ㆍ서춘(徐椿) 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宋繼白)과 이광수(李光洙)를 국내와 상하이로 파견하였고, 2월 8일 유학생대회를 열어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ㆍ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국권강탈을 고발하고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였다. 국내에서도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윌슨의 14개조 강화원칙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 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다 상하이, 미국, 도쿄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운동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이승훈(李昇薰)ㆍ양전백(梁甸伯)ㆍ길선주(吉善宙) 등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송계백도 최린(崔麟)을 통해 도쿄 유학생들의 소식을 손병희(孫秉熙)ㆍ최남선(崔南善)ㆍ송진우(宋鎭禹) 등에게 전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처음에는 각기 운동을 계획하다가 1919년 2월부터는 함께 협의하였고, 여기에 한용운(韓龍雲) 등의 불교계 인사가 가담했다.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민족대표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2월 하순 박희도(朴熙道)와 이갑성(李甲成)에게 종교계의 계획에 합류할 것을 요구받고 일단 민족대표들의 계획에 합류한 뒤 3월 5일에 다시 서울에서 독자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 결과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 등이 작성되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사전에 배포되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과 시위, 독립선언서의 배포 등의 계획을 준비하였다. 전개과정-3ㆍ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3ㆍ1운동의 전개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점화기)에서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ㆍ진남포ㆍ안주ㆍ의주ㆍ선천ㆍ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을 특징으로 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한 2단계(도시확산기)에 운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되었으며,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 중순 이후의 3단계(농촌확산기)에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하였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으며, 시위의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의 시기에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폭력투쟁으로 나타났다. 3월 1일에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과 평양ㆍ의주ㆍ선천ㆍ안주ㆍ원산ㆍ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를 군중들이 모여 있던 탑골공원에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泰和館)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하였다.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徐永煥)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그리고 오후 3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에 일본 경찰에 통고하여 스스로 체포되었다.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장소 변경에 당황하여 강기덕(康基德) 등을 민족대표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2시 30분 무렵에 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ㆍ서울역ㆍ정동ㆍ이화학당ㆍ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2일에는 함흥ㆍ수안ㆍ황주ㆍ중화ㆍ강서ㆍ대동ㆍ해주ㆍ개성 등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력이 강한 평안도ㆍ함경도ㆍ황해도의 주요도시들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3월 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였고,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서울의 학생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평양과 광주 등의 학생들도 결사대를 조직해 이에 참여했다. 이 날의 시위는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참배객들에게 운동의 지속성을 전파하여 3월 중순 이후 각 지방으로 시위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3월 10일 이후에는 시위가 경상도ㆍ전라도ㆍ강원도ㆍ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확대되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는데, 이 과정에는 교사와 학생 등 지방 사회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들은 선언서 등의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했으며, 비밀결사와 결사대를 조직해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하였다. 청년과 학생들이 주도한 비밀결사는 전단과 격문 등을 제작ㆍ배포하여 투쟁열기를 높였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신문을 만들어 민족의 총궐기와 결사항쟁을 촉구하기도 했다. 3ㆍ1운동 당시에 발간되었던 신문은 <조선독립신문>, <노동회보>, <반도의 목탁>, <충북자유보>, <혁신공보>, <각성호외보>, <광주신문>, <강화독립회보> 등 30여 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조선독립신문>은 27호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3ㆍ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던 청년과 학생들은 독립청원이라는 대외의존적인 태도를 지녔던 민족대표들과는 달리 민족의 주체역량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동은 3월 중순 이후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노동자ㆍ농민ㆍ중소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중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서울에서는 3월 5일에 앞장섰던 학생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으나, 3월 4일에 시작된 평양과 선천의 철시투쟁에 이어 3월 9일부터 서울 시내의 주요 상점도 철시를 하면서 상인들도 항일투쟁에 나섰다. 3월 20일 무렵부터는 노동자들의 궐기를 호소하는 <노동회보>가 배포되었고, 3월 22일에는 남대문 앞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날부터 시내 곳곳에서 야간시위가 계속되었으며, 3월 26일에는 경성철도와 전차 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노동자의 항일시위는 고양ㆍ부천ㆍ시흥ㆍ김포 등 주변 농촌 지역의 시위를 촉발시켰다. 농민 시위는 주로 장날에 일어났는데, 시위 주동자들은 각 마을로 통문을 돌리거나 전단을 살포하여 미리 시위 계획을 알렸다. 장을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각지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경험을 전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과거 의병투쟁이 활발했던 지역에서는 산상봉화시위나 횃불시위 등을 벌이기도 했으며, 떼를 지어 며칠씩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시위에 참가하는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운동이 발전될수록 투쟁 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되었으며, 비폭력적인 만세시위운동에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폭력투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으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일제의 권력기관에 대해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헌병의 총격 등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면 군중들은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본인과 친일인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빼앗아 소각하는 등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제의 권력기관을 접수하려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원도 통천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국외독립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간도ㆍ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은 3ㆍ1운동 당시 국내진공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일제는 3ㆍ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화성 제암리ㆍ천안 아우내ㆍ정주 곽산ㆍ남원 광한루ㆍ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ㆍ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 의의와 한계-3ㆍ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ㆍ조직화ㆍ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들은 3ㆍ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ㆍ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으며, 중국의 5ㆍ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ㆍ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물리적인 폭압만으로는 3ㆍ1운동으로 분출한 민족의 저항의지를 막을 수 없었으므로 형식적이나마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일부 완화하여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이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3ㆍ1운동은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를 다르게 한 채 분산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전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기 위해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민중의 투쟁력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3ㆍ1운동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계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주체역량보다 외세에 의존해 독립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내세웠고, 일본 정부에 독립의 취지를 건의하여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독립청원의 방식에 의존했다. 하지만 3ㆍ1운동의 경험을 통해 민족의 주체역량에 기초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실력양성과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復辟主義)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외부링크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6647